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무 덴노 (문단 편집) === 기타 === 1882년, 미에현에서 활동하던 민권운동가 오바 나리아키(大庭成章)[* 원래 '오니와 시게아키'라고 서술되었으나 원래는 오-바(おおば)라고 장음으로 읽는다. 헤이안 말기의 무장 오바 카게요시(大庭景義)도 있으니 상당히 오래된 성이다. 이 사람이 원래 성이 없는 평민 출신이었을 수도 있고, 나중에 스스로 고쳤을 수도 있다. 이름의 독음은 요미가나 자료가 보이지 않아 확정할 수는 없으나, 成은 대개 나리, 章은 대부분 아키라고 읽으므로 아마도 '나리아키'일 것이다. 이 사례는 일본 판례 자료인 〈메이지 15년(1882) 형법 시행 직후의 불경죄사건^^9^^(明治十五年刑法施行直後の不敬罪事件^^九^^)〉 (https://koara.lib.keio.ac.jp>modules>xoonips>download.php, [[게이오기주쿠대학]] 사이트)에도 나오지만, 일본 논문·서적에서는 자주 인용되진 않는다. 오바 나리아키가 불경죄로 입건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많이 알려진 사례는 아닌 듯하다.]가 연설을 하면서 >진무 덴노는 외국에서 힘을 키운 뒤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겁쟁이들을 제압하고 일본 전체를 먹은 큰 도적이요, 그 후손인 금상 덴노(메이지)는 물론 [[고관대작]]들도 모두 큰 도적이다. 라는 논조로 주장하다가 불경죄로 잡혀들어가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현대 일본의 [[넷 우익]]들은 진무 덴노를 가리켜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찬양하고 있는데,[* [[재특회]]에서도 했던 주장인데, 사실 매우 황당하지만 일본인들 중에서 우익 성향이 강한 인물들은 아예 일본이 서구보다 더 먼저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면서 자국사를 찬양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일본의 자유주의자들은 "'''현대 일본인의 정치적 감각과 수준은 오바 나리아키 때보다 더 퇴보했다.'''" 라고 비판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